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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일주일》 이 있다. 만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구의 증명
"천년 후에도 사람이 존재할까?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때가 천년 후 라면 좋겠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까지, 인류 최후의 1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 궁금하다. 천년 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일에 충격을 받을지, 혐오를 느낄지,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야 할지, 모멸감에 빠질지, 어떤 이를 비난하고 조롱할지, 어떤 자를 미친 자라고 부를지,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무엇을 갈망할지, 천 년 후에 아름다움과 추앙, 선과 악. 그때도 돈이 존재를 결정할까? 대체 뭘 먹고살까? 지금의 '인간적'이라는 말과 천년 후에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를까? 천년 후 사람들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거라 믿고 싶다. 아니, 천 년 후에는 글을 쓰고 있는 일류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다. 글을 쓰고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나는 그만큼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성서는 언제 쓰였지? 적어도 2000년은 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은 2000년 전에 써진 글을 읽으며 감동하고 위로받고 황홀해하고 미친다. 그리고 믿는다. '성스러운 축복' 없이 아이를 낳았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그건, '40일 동안 비가 내렸다'거나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사건인데,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이래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내겐 부활과 동정녀에 잉태가 필요하다. 윤리나 과학이 끼어들 여지없는 기적의 필요하다. 천년 후가 필요하다. 종말 혹은 영생이 필요하다. 미친 자아가 필요하다. 인간이 아닌 상태라도 좋으니, 당신이 필요하다. '믿음'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후, 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경찰서에 가서 자백할 수도 있다. 성직자를 찾아가 고백할 수도 있다. '나는 사람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최가 됩니까?' 그러면 그들의 방식으로 나를 처리해 주겠지. 나는 말하는 것을 말하고 가라는 곳으로 가면 될 것이다. 이 글을 끝내고, 그리고 최대한 오래 살아남는 것, 내가 원하는 전부다.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죽은 군은 꼭 술에 취해서 곤히 잠든 사람 같았다. 나는 길바닥에 앉아 죽은 구를 안고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에서 세운 냄새가 났다. 피가 올 것 같다.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좋겠다. 아니야. 비가 오면 안 되지. 깊은 밤. 잠 못 드는 몸처럼 이리저리 뒤척이던 걱정과 바람 세 골까지 내려온 구의 머리칼을 어루 만 지. 분석한 머리칼이 한 움큼 빠졌다. 손에 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버릴 수 없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밤은 천천히 가고, 비는 오지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구는 숨 쉬지 않았다. 죽은 구를 안고 있었지만 그와 죽음이란 개념은 전혀 연결되지 않았고, 같은 그걸 띤 자석처럼 강렬하게 어긋났다. 모든 것은 상상 속에 일어난 일 같았다. 서서히 의 굳어가는 굴을 집까지 옮기고, 그로부터 수십 일이 지난 후에도 그랬다. 네가 올 줄 알았다. 우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분명 너를 기다렸지만 내가 죽기 전에 오길 바라는 게 죽은 후에 오길 바라는지 혼란스러웠다. 살아 있을 때도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해, 종종 너에게 선택을 밀었고, 때문에 핀잔을 들었는데,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나는 그 마음을 잊지 못해 칼 방실 팡했다. 죽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기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너에게 그런 짐을 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부제만큼이나 너의 남은 생에 지우기 힘든 얼룩과 상처를 남길 테니까 죽기 전에 너에게 꼭 해야 할 말은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 말해야 할 것은, 너와 함께 했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다 하였을 테고, 그럼에도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말이 되어 나와 버리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주는 것이라고 너는 나의 그런 마음까지 알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내 믿음은 올랐을까? 나는 너에게 해야 할 말을 다 했던가 아니지 무엇이 아닌가 하면 말이고 진심이고 그런 게 아니라. 넌 내가 죽기 전에 왔어야 했다. 내가 그것을 바랐다는 걸 죽는 순간에 알았다. 너를 보고 싶었다. 낡고 깨진 공중전화 부스가 아니라, 닳고 더러운 보도블록 틈새 핀 잡초가 아니라, 뿌옇고 붉은 팜 하늘이나 뭐, 나만 곳에 십자가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내가 모른다면 난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가 다른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만 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에 고여 있는 가로등 불빛을 봤다. 눈을 감기 전까지 그것을 보았다.
총평
깊은 사유와 철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다. 주인공의 내적 모색과 미래에 대한 고찰이 강조하고 이야기의 흐름은 매우 철학적이며, 과거와 미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깊이 있게 다뤄지고 있다 천 년 후의 인류와 현재의 우리 사회 간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사회적 변화와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한다. 또한, 인간의 존재와 불멸에 대한 염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 믿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감정이 잘 그려지며, 죽음과 연민에 대한 진실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소망에 대한 무한한 사색을 제안한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깊은 사유와 철학적인 고찰을 제공하며, 현실과 이상,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생각을 일으키는 작품으로서 매력적이다.